오후를 풀 깎는데 보냈더니 오른손이 떨려서 클릭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손의 기준점(reference point이 예초기의 진동상태에 적응한 바이다 라고 하면 더 멋있다는 걸 후임친구가 알려주었다. 예초기 작업은 풀을 베어 제거한다기보다는 풀을 갈아 넓게 펴바른다는 것이 더 근접한 표현이 된다. 줄을 길게 빼고 가솔린 냄새 시큼하도록 강도를 높인 채 전진하면 이 여자가 된 듯 강력한 염력을 만끽할 수 있다.
사무실에서는 점심시간 전 막간을 이용해서 의자 모형 하나를 만들었다. 며칠 전에 간단히 그려놓았던 것이다. 의자 디자인에 대해 아는 척 할 생각일랑 깨알만큼도 없다. 내가 (주로 나무로) 쓸모있는 물건들과 세간을 만드는 데에 관심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어디까지나 쓱쓱 썰어서 대충 구십도로 붙이고 못질하면 되는 책상이나 침대 같은 것들이었지, 허접하면 끝도 없이 허접해질 수 있는 의자를 만드는 건 원래 목록에 없었다. 하지만 재미삼아 그리다 보니 너무 두껍지 않은 합판을 직선으로만 잘라서 못과 풀질로 잇고 니은자형 철물로 직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썩 보기 좋고 편한 의자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는 Jasper Morrison의 Plywood Chair의 투박한 사촌 정도 되는 모양인데 직접 3mm 보드로 모형을 만들어 보니 꽤나 그럴싸하다. 이거 제대하면 만들어야 되겠다. 그런데 이렇게 아직도 오른손이 떨려서야 원…….
군대에 오고 나서 내 컴퓨터에선 잠시 시간이 멈춰 있다. 입대 후 새로 설치한 프로그램은 간단한 유틸리티 몇 개 빼면 거의 없고 판올림한 것은 MacOS Lion이 유일하다. 내 맥북을 쓰는 일이 한 달에 한 번 꼴로 줄었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 컴퓨터를 사용하는 습관이 적잖이 바뀌었다. 시대가 그렇게 바뀌고 있나보다.
우선 왔다리갔다리하던 우리 집 무선인터넷을 손봐 이더넷 포트를 전혀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부대에 가지고 들어가는 전자기기가 아이팟 클래식뿐이므로 음악을 전부 그리로 옮겼다. 중고 아이폰을 샀고 동생과 함께 쓰는 아이패드가 생겼기 때문에 맥북을 가지고 나가는 일이 적어졌다. 설명 : 아이패드를 즐겨 사용하는 아버지에게 누군가 아이패드를 선물했다고 한다……. 잘 납득가지 않는 선물이지만 우리에게 떨어졌으니 감사할 뿐. 집에 전자레인지가 89년생인데 아이패드 세 개가 있는 건 뭔가 초현실적이다. 6년 전 내가 맥북을 샀을 때만 해도 주변에 이게 뭐냐고 물어보는 사람이 많았는데 지금은 집에 아이폰이 넷 아이패드가 셋, 오클라호마 외삼촌께서 집에서 묵으시면서 선물한 애플티비 같은 것까지 들어섰고 아버지는 아이브런치라는 애플제품/브런치 주말 동호회를 나가신다. 밖에 나가도 예전처럼 맥북이니까 자랑스럽게 꺼내놓고 하지 않는다. 미국에서처럼 일상적으로 보이는 물건이 되었으니까. 또 어떤 새로운 게 나왔나 하고 프리미엄 리셀러에 발을 들이지도 않는다. 그런 덴 이제 가끔 와이파이가 없는데 확인할 게 있을 때 갈 뿐이다. 다 가진 기분은 생각보다 싱겁다.
군 내에서 컴퓨터 사용(지금과 같이)이란 모든 자료와 기록을 온라인을 통해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저장할 수 없기 때문에, 사실상 클라우드와 같은 요새 많이 쓰이는 기술이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보안상 또는 사양상의 문제로 아주 제한적이다. Gmail, Google Reader, Google Docs(운좋게 Chrome깔린 컴퓨터가 걸리면)에 의존하다시피 하는데 구글 약정이 좀 껄끄러운 부분도 있고 모바일기기와 연동도 Reader나 Docs의 경우 불편한 점이 많은데 이런 건 전역이 답이니까 불평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이미지 업로드가 불가능하다던가 Craigslist가 유해사이트로 지정되어 있다던가 하는 대목은 좀 서운하다. Craigslist에서 방 시세라도 보면서 대리만족 하려고 했단 말이다.

아침에 후임친구와 함께 홍차를 우려마셨다. 이런 문장은 사실 진짜 웃기다. 군인이 토요일 아침에 생활관에서 하(夏)체련복을 입고 우아하게 홍차를 마셨다는 것……. 예전의 나라도 웃었을 것지만 사실 우리는 제법 우아할 때도 있다. Mariage Frères 프렌치 얼 그레이를 진하게 우려 젖과 당을 넣어 먹었다고 하면 더 놀라겠지. 물론 함께 먹은 것은 몽쉘 카카오케이크였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부분의 군필들은 군에서 그 어떠한 우아한 짓이라도 하며 지냈다는 경험에 공감하기 어려울 것이다. 똑똑한 사람은 안 똑똑하게, 고상한 사람은 저열하게, 생각이 있는 사람은 뇌를 끄고 살았다는 식의 보고가 흔하니까. 밖에서 어떤 사람이었건간에 대개 군대는 닥치고 고생하러 다녀오는 곳이다. 이런 면에서 나를 비롯한 소수의 현역들은 매우 특권층이다. 많은 것이 허락돼 있고 많은 것이 제공되어서 운이 좋은 것이 아니라 이 안에서 허송세월하지 않을 권리를 서로 무척 존중하는 사람들과 오손도손 살고 있어서 그렇다. (고생을 안 한다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 내가 처음 들어왔을 당시 우리 부대는 지금에 비하면 약간 팍팍했을지언정 그때도 사람들 개개인은 사회문화적으로 비슷한 점이 충분한 사람들이어서 크게 한숨 놓았던 기억이 있다. 들어온 첫날 밤에 「알모도바르 영화 중 유명한 것들은 대부분 보았습니다」 같은 말이 필요하리라고는 상상 못 했었다.
절대적으로 환경이 좋은 측면도 많다. 군부대지만 대학을 겸하다보니 도서관이 매우 훌륭하다. 사서들의 안목이 빼어난데 특히 영화제 수상작 DVD는 국가를 막론하고 풍성하게 갖추고 있는 편이다. 취침 전에 취향이 맞는 사람끼리 생활관에 모여서 영화 보는 재미가 좋다. 물론 보이스 코리아를 선택하는 생활관도 있으니 고민할 필요는 없다. 오늘은 같이 운동하고 돌아와 좀 피곤하긴 해도 토요일이고 하니 한 편 보는게 옳겠다. 어린이날이 부드럽게 지나가고 있다.

by Cornelius De Witt, found via Brain Pickings
코감기였는데 주위 몇 명이 진작에 앓았던 지독한 균이었다. 올 봄부터 관습이 바뀌어 매일 아침 가벼운 구보를 다같이 뛰는데, 코막힘과 기침 때문에 불편했다. 잘 때는 각종 액체가 하관을 뒤덮어 가관이었고 옆 친구들에게 미안케스리 코도 많이 골게 되었다. 정말 폼 안 나는 투병이었다. 목이 부으니까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엔딩>을 엠넷 라이브 버전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봄바람 휘날리"며"의 가성음을 들릴락말락한 쇳날숨소리로 처리하는 기술이다)
한편 친한 후임이 다른 병에 걸렸는데 참지 말고 군 병원 밖 병원 얼른 가고 집에도 연락하라는 내 잔소리에 괜찮다고 그럴 생각 없다고 잘라 말하는 게 갑자기 너무 서운해서 버럭 화를 냈다. 그것도 날씨도 좋아 족구하고 잠깐 쉬면서 놀다가. 아마 군 생활 중에 남에게 대놓고 화난 모습을 보인 건 처음이었을 거다.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동기가 내가 걱정하는 마음이 걷어차인 기분이라 그랬겠지 라고 대신 설명해 주었다. 나도 남이 날 걱정하는 마음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면 마음은 몰라주고 꺼지라는 태도를 보인 적 많다. 자격이 없는 화를 내다니 부끄럽다.
엄마는 항상 오바하지 말라고 한다. 신나는 일이 있어도 오바하지 말라고 하고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오바하면 안 된다고 한다. 돌아보니 난 쉽게 오바한다. 예를 들어 「내 힘으로만 짐을 싸고 수레로 옮겨서 1시간 떨어진 창고에 보관하는 건 멋진 일이야」라고 정해놓으면 몸이 감당할 수 없어도 한다. 어제도 가볍게 오바했더니 몸이 목감기를 먹었다. <사생활의 역사>라는 2kg짜리 책을 읽으며 후임친구가 준 분말두유를 타 먹으며 침대에 있었다. 비가 와서 꽃이 모두 떨어졌다.


Meagan이란 인물을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맨 위의 잔치 장면은 너무나 쫄깃해서 올려놓았다.
이렇게 잘 나가는 연속극이 왜 사시사철 방영되지 못하는지에 대한 의문 속에 무려 일 년 반을 기다려왔다. 네 번째 시즌 마지막 방영분이 입대 직전인 2010년 8월이었으니 군생활 내내 이걸 못 보고 살았던 거다. 물론 그 동안 Boardwalk Empire라는 훌륭한 드라마와 이미 고인이 된 Bored to Death라는 산뜻하고 지역색 짙은 코메디를 만날 수 있게 되었지만 휴가에서 돌아온 이번 주 기다리고 기다리던 매드 맨 3시간분을 보니 이 정도로 빠져드는 연속극은 어디에도 없다는 게 다시금 분명해졌다. 여느 극처럼 애써 만든 인물이 제대로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앞선 나머지 갈등과 속내를 대놓고 읽어주지 않고 술술 풀어가는 대담함이 좋고, 기초적인 수준일 수도 있지만 역사나 사회학에 관심 있는 사람의 관련촉각을 무한히 자극하며 시각 음악적 양식은 이미 다른 어떤 텔레비전 텍스트와 비교해도 우습게 월등한 수준이다. 특히 새 시즌 들어 60년대 중반 특유의 미친 색과 뿌잉뿌잉하게 낙천적인 디자인이 풍부하게 전면에 배치돼 눈이 호강했다. 물론 극에서처럼 세월이 변한다고 삶의 모든 구석구석이 뿅 하고 바뀌는 건 웃기는 일이겠지만, 유행이 매우 진하게 드러나는 배경과 인물을 바탕한 극이라는 점을 십분 이용해 더 과장된 천국버전을 보였다고 이해하면 된다. 매드 맨을 볼 때면, 세상이 한순간에 보는 앞에서 조각조각 부서져 버릴 것 같은 연약한 마음과 그러나 부서진 조각까지 전부 다 내 것인 것 같은 근거 없이 다 가진 맘이 동시에 든다. 어쨌든 오랜만에 새 시즌이 시작한 올봄은 아직 안 본 사람이라면 첫 시즌부터 시작하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지금 시작한다면, 부럽다.
체력검정을 위해 3km 달리기를 할 때 나의 심장은 뛰고 있었다. 다만 몸이 충분히 뛰고 있지 않았다. 뛰는 건 어릴 때부터 축구와 함께 가장 못 하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무척 슬픈 추억 한 가지를 들자면 2학년 때 사백미터 달리기를 꼴찌로 들어오고 있는데 나를 너무나 사랑한 엄마가 이미 헤진 결승선 앞에서 옳지 괜저야 잘한다 라고 목청껏 응원하며 두 팔을 벌리고 있던 기억이다. 그 결승선까지가 너무나 멀었고 시선이 힘들어 멀쩡한 다리를 절기까지 하며 최대한 천천히 들어왔었다. 나야 미안해, 그렇게까지밖에 뛰질 못해서. 그런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왔단다.
소년 시절에 비하면 살도 빠지고 했지만 역시 뛰는 건 어렵다. 작년에 팔굽혀펴기 '특급'을 받아놓고도 삼십초 차로 달리기 과락 판정을 받아서 휴가 하루를 깎이기에 이르렀다. 매일 구보하는 육군이나 공군 전투부대에 비하면 운동할 시간이 없다시피하니 밖에서와 비교해서 체력이 별로 늘지도 않았었다. 팔굽혀펴기 팔십 개를 하고도 달리기 3급을 끝내 못 만든 나를 사람들은 팔만 있는 앉은뱅이 보듯 했다.
지난 겨울 난 윗몸일으키기를 연습했다. 작년엔 겨우 통과했었는데 꾸준히 연습해서 이제 이 분 안에 아흔 개 가까이 할 수 있게 됐다. 오늘 드디어 올해 체력검정을 했는데 윗몸일으키기 특급, 팔굽혀펴기 1급을 맞았다. 문제는 언제나처럼 달리기인데 멋찐 후임친구(23세, 전기공학 전공 피아니스트 겸 애니메 애호가)가 내 바로 앞을 달리며 보조도우미 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과연 (지켜보던 안소위님의 말에 따르면 개처럼 충실하게) 내 곁에서 같이 뛰어 준 후임친구 덕분에 중반까지는 원만하게 뛰었습니다만 후반에 역시나 헥헥대다가, 결국 간당간당하다 싶은 순간에 들어왔는데 충격적인 결과: 1초 늦어서 불합격 됐다. 통과 못 한 모든 장병들을 통틀어 내 기록이 제일 높다는 데 만족하며 특급/1급/불합격이라는 비정상적으로 불균형한 기록을 가슴에 묻고 가정의 달에 다시금 도전하겠습니다. 절 동정하지 마세요!





치아바타 + 오븐 구이 토마토 + 오븐 구이 파프리카 + 팬 구이 새송이 + 한우 목살 팬/오븐 구이 = 당연히 맛있는 샌드위치. 상추 + 연어 + 살짝 구운 양파 + 페타치즈 = 페타치즈가 남았기 때문에 만든 샐러드. 집에 맛없는 토마토가 있다 해서 저온에서 올리브유 뿌려 구워놨었다. 파프리카도 똑같이 하고, 스테이크용이 아닌 한우는 올리브유와 로즈마리에 절였다가 팬에 지지고 오븐에서 마져 구웠다. 소스 없는 샌드위치이므로 간을 세게 주었다. 마지막 순간에 새송이를 넣었는데 최고의 선택이었다. 참기름 몇 방울로 구워 넣었다.
집에 드디어 원두분쇄기가 생겼다. 집에 있던 분쇄커피가 모두 원두로 교체되었다. 집에 에스프레소 기계, 프렌치 프레스, 핸드 드립, 모카프레스가 모두 있는 건 무척 달콤한 일이다. 에스프레소 기계와 프렌치 프레스는 미국에서 내가 산 것이고 나머지 둘은 집에서 산 것인데 살림을 합치면서 풍족해졌다.








저녁 먹으러 부대를 나온 병장 무가식을 마말과 같이 만났다. 녹사평. 용산구를 이제 나보다 잘 안다는 게 샘 납니다. 무지 오랜만에 삼겹살 목살을 먹었다. 그리고 이코복스 커피 이태원점에는 잡지에 나왔던 사장님이 계셨지만 신사점과 달리 디카페인 커피가 없다는 점을 배웠다.

자전거를 타고 아침에 나와서 학의천, 안양천을 따라 영등포까지 갔다. 여의도 지나 홍대까지 가려고 했던 계획에 조금 못 미치지만 샅샅이 볼 기회가 거의 없는 구로구를 원자재/공구상 중심으로 구석구석 볼 수 있어 좋았다. 날씨는 좋았고 얼굴이 좀 그을렸다. 자전거길이 보행자로에서 분리, 2차선으로 만든 구간이 대부분이어서 편하게 탔지만 사진기와 아이패드 이것저것 든 가방을 어깨통증 문제로 손잡이에 끼고 가려니까 꽤 지쳤다. 중간에 사진기를 꺼내서 청둥오리를 찍고 있으려니까 바위에 앉아 계시던 베레모 할아버지가 「그런 건 80-200으로 찍어야지 오십미리로 어떻게 찍누」라고 하셨다.







타임스퀘어에 매어 놓았다가 밤에 다시 끌고 왔다. 여의도에서 영등포로 목적지를 바꾼 것 역시 타임스퀘어 내 무인양품에서 칫솔을 사야 했기 때문이다. 기분이 아주 좋을 때가 아니면 잘 먹지 않는 스무디킹 아몬드모카 단백질 스무디를 마시면서 책을 좀 보다가 약속시간에 녹사평으로 갔다. 거리는 25km를 조금 넘는데 왕복이니 오십키로 정도. 평일에도 자전거는 정말 많다.










그러나 방금 남도 자전거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마말에 비하면 초라하지. 고등학교 졸업 후 한국에서 보는 건 처음이다. 마말은 프랑스행 직전에 보고 이 년 만이다. 만나서 맥주 (신사동 다이너펍) 마시니까 왠지 다시 뉴욕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쇠고기에 대해 오랫동안 얘기했다.

여든 세 살 할머니가 시외버스 옆자리에 앉았다. 함흥에서 난 분이다. 광복 이틀 전 통역관인 아버지께서 소식을 먼저 알고 한탄강 건너 월남 (따발총 세례 받을 때에 둘도 없는 불자였던 큰언니는 나도 몰래 난생 처음 「하느님!」 했단다), 이승만 때 국회위원 밑에서도 잠깐 일하고 혜화 작은아버지 댁에 김 구 선생을 모셨던 걸 기억하는 분이었는데 칠순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젊고 옛날 것 지금 것 할 거 없이 그냥 전부를 알고 있는 슈퍼할머니였다. 자리에 앉을 때 웃는 낯으로 대하는 걸 보고 「된 청년이다」 싶어 시작했다는 얘기가 호계동 도착까지 이어졌는데 역사와 세계정세와 종교, 윤리 등을 넘나드는 진심 재미있는 대화(라기보다는 강의)였다. 연신 청년, 청년 하시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려야 할 것 같을 정도의 과한 칭찬으로 연신 본 자아를 북돋어 주었다. 기분 좋게 집에 왔다.
아침에 같이 부대를 나온 후임친구 세 명 + 이미 나와 있던 선임어르신 한 분을 금세 만났다. 돈코보쌈에서 모둠보쌈, 히비에서 음료. 폴앤폴리나에서 빵 등. 재혁이 빼고는 밖에서 후임 만나는 게 처음이다. 선임들은 많이도 만났는데. 괜히 휴간데 선임이 불러내는 느낌이 들까 봐 그 동안 부른 적 없었다. 오늘은 즐거웠으니 걱정 없다. 갈 길 가고 나서 홍대를 한참 더 배회했다. 두성페이퍼갤러리에서 지난 번 맛뵈기 구매했던 종이들을 큰손구매했다. 오 년 전 안경을 맞추었던 곳은 없어져서 테를 새로 하려 했던 계획은 죽었다. 구르메 마켓(Gourmet Market)이라는 평이한 이름의 작은 식재료 상가를 처음 가 봤는데 규모에 비해 상품이 알차서 좋았다. 깜짝 놀랄 만큼 싼 탈리아뗄리도 있어서 한 상자를 샀다. 냉동 반건조토마토에만 가격표가 없어서 사장님께 여쭸더니 화들짝 놀라시며 「그, 그게 가격표를 진작 붙이려고 했다구요! 여기 다 뽑아놨는데 스카치테이프가 없어서」라며 왠지 내게 가격표 한 뭉치를 보여주셨다. 당황하시다니, 어딘가 정이 갔다. (토마토가 너무 비싸다는 데엔 사장님도 나도 동의했다.)





















너무 뜨거울 때 우린 녹차를 마시면서
화장실에서 읽었던 책 한 구절을 생각해냈다.
─저녁이란 아침만큼이나 의미심장하지만
우리는 그 가능성을 줄곧 외면해왔다.
이윽고 입가에 점이 있는 여자가 허락없이 집에 들어와
제 옷가지며 칫솔 따위를 챙겨 나갔다.
그녀와 사귄 지는 오십 일이 되었고
헤어진 일은 결코 없었다.
나는 현실과 미래를 구분하는 데 있어
그녀보다 약간 더 전문적이었다.
지금을 이해하는 사람이었으면 좋았겠지만
몸놀림이 모든 죄를 사하곤 했다.
너무 뜨거운 물로 우린 녹차는
식혀도 결코 적당해지지 않는다.
범계중학교 2층 방송실 방송칸 안 창가에 앉아 또 이재진과 강성훈 솔로음반을 신청한 징글징글한 젝키팬에게 CD를 넘겨받으며 내려간 발목양말을 추어올리던 그 때 그 놈, 앞머리를 까면 죽는 줄 알았던 그 때의 나는 도무지 나라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오륙 년 전의 김괜저는 The Velvet Underground보다 자우림을, 양희은보다 조성모를 좋아했었다.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작가가 뉘냐는 질문에 「톨킨입니다」하는 데 스스럼이 없었던 놈이었다. 물론 대놓고 진지하게 그러진 않았겠지만 비밀번호 분실용 질문답변과 같은 사적인 곳에선 그게 진실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The Brief Wondrous Life of Oscar Wao를 막 다 읽었는데 반지의 제왕에 대한 언급과 인용이 무척 많아 그 때가 많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금 군인(그제 병장을 달았는데: 축하하면 미워할 것임)으로지내는 나 역시 칠팔 년 지나면, 아니 칠팔 년이 뭐야 뉴욕에 돌아가 일 년만 살아도 내가 언제 그런 하급관물(下級官物)였단 말씀이오 하며 이 때가 까마득해질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오 그 삼십살의 나는 부디 이 글을 우연으로라도 읽고 그래 나도 짧지 않은 시간동안 아침의 낙은 실내점호, 일과 중의 낙은 일층매점이요 저녁의 낙은 귀여우신 후임친구들과 족구와 체스와 마피아하는 것이었던 시절, 휴가날 아침엔 제2정문까지 걷는 길이 극락가는 하늘길인 마냥 입꼬리가 올라가는 여느같은 군대사람이었던 때가 있었단 걸 기억하기 바란다.









